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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임진왜란 순서!!

뽀로로친구에디 2018. 1. 15. 09:02

한국사 임진왜란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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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4 왜란발생

1592.4 충주 탐금대 전투(신립) 

1592.7 한산도대첩(이순진) - 학익진

1592.10 진주대첩(김시민)

1593.1 평양성 탈환

1593.2 행주대첩(권율)

1593.6 진주혈전(논개)

1597.9 명량대첩

1598.11 노량해전-이순신 장군 전사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전국시대 통일>

당시 조선 명나라 정벌을 계획하고 있던 일본의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선 정벌을 명령한다.


<고니시 유키나가>


임진왜란 발발 (1592년 음력 4월 13일)

 1592년 음력 4월 13일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가 포함된 제1군이 병력 1만 8700명과 병선 700척을 이끌고 동래부 영도에 상륙한다. 이 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병력을 둘로 나눠 다대포로도 같이 공격했다.

<부산진 순절도>


부산진성 함락

그 모습을 본 경상좌수사 박홍은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른 뒤 도망쳤고 경상우수사 원균도 부하에게 우수영을 맡겨 놓고 도망쳤다. 1592년 5월 24일(음력 4월 14일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이 부산진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했다. 전투는 오전 5시~7시에 첫 전투가 벌어졌다.  부산진성을 지키는 장수 부산진 첨사 정발은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으며, 오전 10시~12에 2차 전투 끝에 4시간 만에 부산진성은 함락되었다. 부산진 첨사 정발은 머리에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부산진성 안의 군민들 역시 끝까지 저항했고 그 결과 군민 3000명이 모조리 죽거나 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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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 순절도>


동래성 함락

고니시유키나가는 조선군과 협상을 위해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패목을 세우게 했고, 송상현은 곧 거기에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회답하였다. 그리고 동래성 안에서는 백성들까지 수비에 가담하여 저항하여 한동안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듯하였으나, 일본군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동문의 인생문(人生門)을 집중공격함으로써 방어선을 뚫는 데 성공하였다. 성이 뚫리고 동래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경상도 충청도 함락>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부산진성과 동래성 함락 후 가토 기요마사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함께 경상도 및 충청도로 진격해 각지의 성들을 함락시키고 충주까지 진격한다.



<신립 장군>


탄금대 전투 (신립 장군 전사)

 일본군 제1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4월 28일 새벽에 문경을 떠나 정오 무렵 충주에 진입하여 충주 탄금대 송산에 매복해있던 신립의 8천-1만 6천 군사들은 신립을 따라 일제히 탄금대 송산을 빠져나와 단월역으로 진격해온다. 당시 전투 장소가 단월역 앞이었음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일본군들은 조선군과의 숫자 차이가 너무 극명하게 차이나자 당황하고 두려워하였다. 반면 조선군 8천-1만 6천명은 기병 숫자가 상당부분 많았으며 조선군은 자신의 숫적 우세를 믿고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당황하지않고 일본군에게 연설을 하며 승리를 확신시켰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문경새재에 도착한 이후부터 고니시 유키나가의 명령에 의해 일본군은 3개의 군대로 나뉘어 운용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비밀스럽게 진격하고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중군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명령에 의해 모든 깃발을 내리고 기운 잃은 척 허장성세로 조선군을 향해 천천히 진군해오자 신립 8천-1만 6천은 일본군의 좌군, 우군, 배후 공격 부대, 충주성 점령 기동부대의 존재를 까마득히 모르고 일본군의 중앙군만 보고 승리를 확신하고 학익진을 펼쳐 중앙군을 포위해 그들이 단월역 앞 마을(충주 건국대 캠퍼스)에서 절대 빠져나가지못하게하려고하려고하였다. 달천 평야의 드넓은 논밭은 축축히 젖어있는 상태라서 늪지처럼 되어있어 궁기병의 히트 앤 런 사격전법이 불가능했고 진격 속도도 심히 더뎠다. 조선군 8천명과 일본 중앙군이 마주 치자 갑자기 중앙군의 깃발이 일제히 무수히 펄럭여서 엄청나게 많은 군대인 것 같은 착각을 들게한다! 조선군 8천은 갑자기 숫자가 많아 진 것같이 보이는 중앙군을 보고 시각의 혼란을 일으키는 사이 그 때 일본군의 좌군과 우군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며 일어나 조선군의 좌,우(동東,서西)를 포위하고 조총을 우레와 같이 퍼붓고 장궁을 쏴대었다. 중앙군 역시 조총과 장궁을 우레, 비오듯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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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조선군은 늪지를 헤쳐 나오지 못하고 조총 사격만 쳐받아버려서 조선 8천군은 그 맹렬한 포화를 견디지못하고 뒤로 물러난다. 그 후 다시 2~3차례 돌격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 사이 충주성이 일본군의 기동 부대에 점령을 당했다. 그러자 신립은 정신이 나가 충주성을 구하러 가버린다. 총대장이 자리를 떠버리자 군사들은 당황하여 대열을 이루지못하고 동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충주성을 구하러 출격한 신립 군사는 충주성 안의 호각 소리 3번과 함께 출격한 일본 정예군에게 크게 깨지고 신립은 급히 도망친다. 그리고 일본군은 조선군 8천의 배후를 치며 좌군,우군,중군과 함께 조선군 8천을 완벽히 포위하며 미친 물결처럼 솟구치듯이 진격해온다. 그 소식에 놀란 조선군들은 당황하여 일본군은 60만이나 된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번져갔다. 일본군은 조총 포화 사격에 더해 2m의 거대한 일본도를 든 노다치 사무라이들이 큰 함성 소리와 함께 달려들어 마구잡이로 살륙하니 조선 8천군은 겁에 질려 모조리 달아나버렸다.  일본군은 그 기세를 놓치지않고 계속 추격하여 조선군을 4면으로 겹겹이 포위하여 육로로 도망칠 길을 하나도 주지않는다. 결국 조선 8천군은 모두 다 달천강으로 몰려버려 장수, 병졸 할 것없이 모두 강물에 몸을 던졌는데. 대부분 익사해버렸다. 조선군 중에 생존하여 탈출한 자는 이일을 포함해 겨우 4명에 불과했다. 전투 종결 후 일본군은 조선군 시체들 중 3000구만 목을 베고 조선군 항복자 수백명을 받아들였다. 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군과 조선군이 싸우고 있을 때 멀찍이서 구경만 하면서 지나갔다


<충무공 이순신>



옥포 해전 (첫 승리, 이순신 장군)

옥포 해전(玉浦海戰)은 1592년(선조 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경상도 거제현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다. 옥포해전은 이순신이 첫 승전을 알리게 된 해전이다. 6월 16일(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에 침략했던 왜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17일(음력 5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육지로 도망간 적들을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합포 해전(合浦海戰)은 옥포 해전이 벌어진 당일(선조 25년 음력 5월 7일) 오후에 있었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아직 옥포 해전의 소식을 접하지 못한 왜군의 소함대(5척)를 전멸시켰다.

적진포 해전(赤珍浦海戰)은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이 있은 그 다음날인 1592년 6월 17일(선조 25년 음력 5월 8일)에 발생했다. 전날의 여세를 몰아 조선 수군은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 중이던 일본군 함대를 공격하여 모두 11척을 격침시켰다. 이순신의 1차 출정은 적진포 해전으로 마감하고 다시 본영으로 복귀한다. 이때에는 아직 거북선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보통 6월 16일(음력 5월 7일)의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 그리고 이 적진포 해전까지 합쳐서 옥포 해전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곽재우의 칼>


정암진 전투(鼎巖津戰鬪)는 1592년 음력 5월 24일 최초로 의병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로 이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고 곽재우(郭再祐)의 의병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규합되었다.

음력 5월 26일 에케이의 2000명 병력은 정암진 대안에 도착해 지역 주민을 동원해 도하 지점을 설정하고 정찰대를 보내 통과할 지점에 나무 푯말을 꽂아 표시를 해두고 뗏목을 만들어 도하 준비를 했다. 이에 밤 사이에 곽재우는 군사들을 동원해 나무 푯말을 늪지대에 꽂아두고 정암진 요소요소와 숲에 군사들을 매복시켜두었다. 날이 밝자 안코쿠지의 일본군 선봉대가 도하를 시작했으나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 곽재우의 의병군에게 선멸되었고 안코쿠지의 주력군이 남강을 도하했으나 미리 대기하던 곽재우 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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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해전(泗川海戰)은 1592년 음력 5월 29일(양력 7월 8일)에 사천에서 왜수군 13척을 전멸시킨 해전으로, 이순신은 여기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 투입했다.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합포적진포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한 왜군은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을 기도하였다. 1592년 7월 8일(음력 5월 29일) 이순신은 판옥선 40여 척을 거느리고 거제를 출발하여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여 사천 선창에 있는 왜군의 정보를 물어 사천으로 추격하였다.

왜군은 사천으로 상륙하여 배는 산 밑에 매어두고 산위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가에 정박하고 있던 이순신은 단병접전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처음으로 유인작전을 사용하게 된다. 육지에 대기 중이던 왜군이 승선하여 조선 수군 함대를 쫓아오자 바다에서 뱃머리를 돌려 반격으로 나섰다.

선두는 역시 거북선. 거북선 돌격장인 이언량,이기남이 거북선을 지휘을 하고 돌격하며 왜 수군 사이로 헤집고 다니자 판옥선들이 후미에서 화포 공격을 하며 그 뒤를 따랐다. 결과는 적 함대 13척 모두 격침.

<사천해전>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을 맞지만, 마친 후 부하를 시켜 칼끝으로 총탄을 파내게 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의 결과 왜군은 패하여 부산과 거제도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선조는 이 전투의 승리로 이순신에게는 정2품인 정헌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을 하사하였고, 이억기와 원균은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당포 해전(唐浦海戰)은 1592년(선조 25년) 7월 10일(음력 6월 2일) 전라좌수영 및 경상우수영의 연합함대가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시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해전이다.

그 전날, 사천 해전을 치른 함대는 사량도(蛇梁島)에 이르러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 전투 당일 오전 8시 척후선으로부터 당포 선창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연합함대는 곧 당포(지금의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 앞바다로 나아갔다. 당포 선창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 및 소선 12척이 매어 있었다. 함대 지휘관은 왜장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였다.

이 전투는 사천 해전에 이어 두 번째로 거북선을 앞세운 전투다. 특히 기함을 집중 공격하였는데, 중위장 권준(權俊)이 가메이 고레노리으로 추정되는 왜장을 화살로 명중시켜 바다로 떨어뜨리자, 첨사(僉使) 김완(金完)과 군관 진무성(陳武晟)이 목을 베었고,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기 바빴다. 하지만, 일본의 기록에서는 왜장 가메이 고레노리는 생환해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권준의 화살 맞고 죽은 적장은 구루시마 미치유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레노리에게 준 금부채가 전리품으로 노획되었다. 왜선 21척은 모두 격침되었고, 사살된 왜군만도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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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항포 해전(唐項浦海戰)은 1592년 음력 6월 5일(양력 7월 13일)에 이순신이 지휘하는 삼도수군 연합함대가 고성의 당황리 앞바다 당항포에서 왜군을 격파한 해전이다. 유인작전으로 먼 바다로 끌어내어 싸웠다.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일본 함선들이 고성의 당항포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조선 수군이 포구로 접근하자, 당항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던 왜군 함대는 일제히 조총을 사격하면서 대응태세를 취하였다.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육지 탈출을 봉쇄하기 위해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기로 하고, 함대를 서서히 철수시켰다. 왜군은 해안에 대기 중이던 병력까지 승선시켜 조선 수군을 추격하였다.

왜 함대가 포구 밖으로 나오자, 조선 수군은 신속히 진형을 바꾸어 퇴로를 차단하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거북선을 뒤따르던 판옥선에 탄 군사들이 불화살을 쏘아 누각선이 화염에 휩싸이자, 당황한 적장은 우왕좌왕하다가 조선군의 화살에 사살되었고, 전의를 상실한 왜군의 대다수가 당항포 먼바다에서 격침되었으며, 일부 함선이 포구 안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도망간 왜군도 이튿날 새벽에 탈출을 시도하던 중 해협 입구를 지키고 있던 조선 수군에게 모두 격침되었다.


용인 전투(龍仁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1592년 7월 13일(음력 6월 5일경기도 용인에서 이광과 윤선각 등이 이끄는 전라도 이광 4만, 전라도방어사 곽영 2만 + 충청도 윤선각 1만 5천의 약 7~8만 남도근왕군(南道勤王軍)이 겨우 1600명의 일본군에게 크게 패한 전투이다.


율포해전(栗浦海戰)은 1592년 7월 15일(음력 6월 7일) 이순신이 이끄는 삼도수사(三道水使)의 연합함대가 거제도 율포만에서 부산으로 향하려던 일본 함대(대선 5척, 소선 2척)를 발견하여, 대선 2척과 소선 1척을 불사르고, 나머지는 모두 붙잡은 해전이다.


제1차 평양성 전투 (일본군이 평양성을 함락)

한양을 함락시키고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7월 9일(음력 6월 1일개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이에 7월 19일(음력 6월 11일조선 왕 선조는 다시 평양에서 의주로 피란하고 평양은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이조판서 이원익등이 지키게 되었다. 성 안에서는 군민 3000~4000명이 을밀대 부근 숲에 옷을 걸치게 하여 군사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7월 21일(음력 6월 13일대동강에 도달한 고니시의 부대는 진을치고 양각도를 건너 대동관을 조총으로 사격했다. 이에 윤두수와 이원익김침 등이 동대원의 일본군 진영을 기습 공격해 수백 명을 죽이고 말 수십 필을 빼앗았다.

그러나 다른 일본군들이 석회탄에 진을 쳐 여기를 지키던 조선군이 크게 패해 도망쳤다. 보고를 들은 윤두수는 허숙과 김억추를 시켜 대동강을 지키게 하고 7월 22일(음력 6월 14일) 새벽에 고언백을 시켜 400명의 병정을 주어 부벽루 밑 능라도로 강을 건너 기습 공격을 하게 했으나 군령을 지키지 못해 오히려 패배해 왕성탄으로 건너왔다.

이것이 치명적인 패배의 원인이 되어 대동강의 수심이 얕은 것을 본 일본군이 강을 건너 평양성을 공격해 왔고 결국 윤두수와 김명원은 군사들을 내보낸 뒤 무기를 모두 풍월루의 연못에 버리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평양성은 전쟁 개전 60일 만에 일본군에게 함락당했다.

😀😀

웅치 전투(熊峙戰鬪)는 임진왜란 초기의 전투 중의 하나이다. 1592년(선조 25년) 8월 13일(음력 7월 7일전라도 웅치 방어선에서 벌인 전투로 김제 군수 정담(鄭湛)과 휘하 방정영과 박석 등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장 황박이광 등의 의병이 합류하였고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 해남군가 변응정(邊應井) 등이 나섰으나 4명의 장군들과 군사 3000명이 전사하고 패배했다.


이치 전투(梨峙戰鬪)는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이치(배고개)에서 임시 도절제사 권율(權慄)과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이끄는 1천여명의 조선군이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2천여명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진격작전을 저지했다.



한산도 대첩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은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살수대첩귀주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또, 살라미스 해전칼레 해전트라팔가르 해전과 함께 세계 4대 해전 중에 하나로 손꼽히며, 진주대첩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손꼽힌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5월 29일(양력 7월 8일)에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6월 10일(양력 7월 18일)까지 사천당포당항포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다.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熊川)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5일(양력 8월 11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다음 날인 6일에 이억기와 더불어 48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다. 7월 7일(양력 8월 13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서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견내량파왜병장 보면 한산도해전 당시 일본 수군은 전선 73척 : 아다케부네 36척, 세키부네 24척, 고바야부네 13척이며, 아다케부네는 전투원 60명, 노꾼 80명, 대포 3문, 철포병 30명이며, 세키부네는 전투원 30명 노꾼 40명 대포 1문 철포병 20명, 고바야부네는 전투원 10명, 노꾼 20명, 철포병 8명이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7110명이 선을 넘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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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금산전투

금산 전투(錦山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음력 7월 9일~음력 7월 10일, 음력 8월 18일에 걸쳐 금산에서 의병 관군들이 싸운 전투로 의병들의 대표적인 혈전으로 꼽힌다.

당시 충청도 금산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으로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592년 7월 31일(음력 6월 23일) 이곳을 점령했다. 이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정암진, 웅치, 이치, 우척현 등 여러 전투에서 패하면서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고 각지의 의병들이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은 1592년(선조 25년) 8월 16일(음력 7월 10일) 조선 수군이 경남 진해에 있는 안골포에서 왜군을 격멸한 해전이다.

😀😀

우척현 전투(牛脊峴戰鬪)는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정암진 전투, 웅치 전투, 이치 전투에 이어 4번째로 거창을 통해 전라도를 침략하려다가 김면(金沔)과 정인홍(鄭仁弘) 등의 의병들과 싸워 크게 패한 전투이다.



제2차 평양성 전투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에게 패배)

평양성이 함락된 후 의주에 피란하던 선조는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원군을 요청하였고 명 황제 만력제 요동 부총병이자 당시 중국에서 이름난 장수였던 조승훈을 우군 부총병으로 임명하고 3000명의 군사를 주어 조선 명나라 1차 원군으로 파견되게 한다.

조승훈의 3000명 명군은 1592년 7월 초순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3000명 군사와 합류해 평양 북방 순안군에 집결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군을 지원하였고 조승훈 평양에 도착하였다.

당시 평양성에는 1만 8700명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1만 1000명의 구로다 나가마사가 있었는데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은 황해도로 옮겨갔는데 이를 본 척후장 순안 군수 황원이 적의 주력 부대가 빠져 나가는 것으로 잘못 보고하여 8월 23일(음력 7월 17일) 아침 조명 연합군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평양성의 문이 열려 있고 적들이 보이지 않자 명군의 선봉장 사유는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병력을 모두 평양성 안으로 진격시켰고 이것이 치명적인 패배의 원인이 되어 길 양편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조총 사격으로 크게 패해 사유가 일본군의 집중 사격을 받아 전사하고 부장 천총 장국충 등도 전사하였다.

결국 부상까지 입은 조승훈은 수십 기의 남은 병력만 이끌고 8월 24일(음력 7월 18일) 요동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조명 연합군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패배로 끝났다.


제3차 평양성 전투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패배)

제2차 평양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의 첫 패전 이후 일본군들을 견제하기 위해 의병들이 나서 중화군 임중량 윤봉, 차은진 차은로형제 등이 의병을 이끌고 진지를 세우고 일본군들과 싸웠으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중화군을 대공격하여 의병이 대부분 전멸하고 윤봉이 전사하였다.

한편 평양성의 일본군 병력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한 조선 조정에서는 총 2만 명의 일본군보다 더 많은 병력을 모아 단독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결정했다.

순변사 이일이 동쪽에서, 조방장 김응서가 서쪽에서, 순찰사 이원익이 북쪽에서 공격하기로 했으며, 9월 6일(음력 8월 1일) 평양성 보통문 밖에 조선군이 이르자 일본군 50명이 공격을 해왔다. 이에 조선군도 활을 쏘아 20명을 사살했다. 조선군은 사기가 올라 성문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으나 이때 성안에서 일본군 수천 명이 나와 공격하면서 결국 조선군은 둘로 갈라져 지휘가 마비되고 훈련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군사들을 흩여져 버리고 조선군은 왜군의 맹공격에 밀렸다. 남은 병력은 간신히 부산원 서쪽으로 후퇴했고 재빨리 후퇴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사상자를 줄였으나 임진왜란 전투 중 최초로 같은 장소에서 3번째로 전투에서 패한 기록을 남겼다.

이 중 김응서만이 적진에 돌격하여 7000명이 전사하고 일본군에게 대패하였다.



청주 전투(淸州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영규가 이끄는 승병이 연합하여 전투를 치러 승리한 전투로 이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했고 이후 제2차 금산 전투로 이어졌다. 지금도 금산에 가면 7백의총과 기념관을 통해 의병들의 애국심과 기개를 느껴볼 수 있다.


경주전투는 1592년(선조 25) 8월 2일 경주 내남면 노곡리에서 경상좌도(慶尙左道)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김호(金虎)가 왜군을 격파한 전투. 노곡전투, 노곡리 전투로 알려져있다.


제2차 금산전투 

금산 전투(錦山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음력 7월 9일~음력 7월 10일음력 8월 18일에 걸쳐 금산에서 의병과 관군들이 싸운 전투로 의병들의 대표적인 혈전으로 꼽힌다.

당시 충청도 금산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으로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592년 7월 31일(음력 6월 23일) 이곳을 점령했다. 이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정암진, 웅치, 이치, 우척현 등 여러 전투에서 패하면서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고 각지의 의병들이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영원산성 전투(領願山城戰鬪)는 임진왜란 초기 원주 목사 김제갑 강원도로 쳐들어오는 왜군에 대항해 영원산성에서 벌인 항전으로 군민 모두가 항전하여 시간을 벌었기 때문에 강원도 지역 중 유일하게 원주 백성들만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다.



진주대첩

제1차 진주성 공방전(第1次 晋州城 攻防戰; 혹은 진주대첩(晋州大捷))은 조선 중기 임진 전쟁 당시 벌어진 공방전이다. 이 공방전은 권율 행주대첩 이순신 한산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이다. 

이순신이 해전에서 수차례 승리를 거두어 서해로 나아가는 바닷길을 장악하였다. 때문에 왜군의 입장에서 해로를 이용한 보급에 차질이 빚어졌다 그러므로 왜군은 바닷길을 포기하고 싸움에 필요한 군량과 같은 전쟁물자를 적군인 조선에서 충족시키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 왜군은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노리고는 병력을 집결시켜 한산도의 관문인 경상도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전란 이래 진주성만은 공략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진주성은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었는데, 첫째로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현재는 내성만 남아있다.) 성의 앞에는 남강이 흐르고 후방 삼면에는 넓고 깊은 해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도를 장악할 본거지이자 전라도 침입의 교두보 역할을 해낼 요충지가 바로 진주성이라 간주하고서(엄밀히 말해 이와 같은 도요토미의 생각은 사실이다.) 공략을 명령했다.

1592년 11월 7일(음력 10월 4일) 왜군은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전투에 앞서 조선의 관군과 의병들은 군을 나누어 기각의 지세를 이루었다. 성내에는 진주 목사 김시민을 위시한 관군 3천8백여 명과 백성이 합세해 결전을 준비했고, 성외에서는 홍의장군 곽재우가 이끄는 경상도 의병들이 왜군을 배후에서 견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왜군은 섣불리 공격을 시작하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주위의 민가를 모조리 불 지르고 총탄과 화살을 마구 쏘아대며 마침내 공격을 개시했다. 성내에 있던 조선 관군은 화차와 현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써, 백성은 돌과 뜨거운 물로써 대항하였다. 더불어 임계영 최경회가 이끄는 전라도 의병 2천여 명은 성외에서 왜군의 후방을 기습공격했고, 나아가 홍의장군 곽재우도 유격전을 전개하여 왜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덧붙여 항우가 이끌던 초나라 군사와 장량의 고사를 생각해내고 이를 흉내낸 것일지는 몰라도, 곽재우는 피리를 불어 왜군의 군심을 흔들었다. 11월 12일(음력 10월 9일) 승리가 점차 목전에 다가오는 중 진주 목사 김시민이 왜군이 쏜 총탄에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진주성을 공격한 지 이레 만인 11월 13일(음력 10월 10일) 싸움에 지친 왜군은 진주성을 포기한채 마침내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 공방전의 주역인 김시민은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1월 21일(음력 10월 18일)에 순국하였다. 향년 39세였다.

이 제1차 진주성 공방전에서 얻은 귀한 승리는 진주대첩으로서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삼대 대첩 중 하나로써,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좌절케 한 전략상 중요한 승리였다.




제4차 평양성 전투(평양성 탈환 성공)

제4차 평양성 전투는 4차례의 평양 전투 중 가장 규모가 큰 대전투이다.

조승훈의 1차 원병군의 패전으로 인해 명나라 조정에서는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4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2차 원병으로 보냈다. 명나라에서는 그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해 유격장군 심유경을 보내 휴전 협상으로 시간을 끌게 하였다.

1593년 1월 15일(1592년 음력 12월 13일) 명나라의 첫 선봉부대가 압록강을 건너고 1월 27일(음력 12월 25일) 이여송의 주력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선조가 있던 의주 용만관으로 진출하였다. 조선에서도 명군에게 식량과 물자를 대주고 도원수 김명원과 우측 방어사 김응서, 좌측 방어사 정희현 등 총 8000명의 군사를 주고 서산대사 사명대사도 승병 2200명을 이끌고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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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니시 유키나가 조명 연합군 평양성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황해도 봉산에 주둔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휘하 장수 오토모 요시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오토모는 이를 거절하고 한양 방면으로 철수하여 일본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1593년 2월 6일(음력 1월 6일)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일본군은 성 방어를 위한 시설을 만들어 평양성을 난공불락 요새로 바꾸고 모란봉에는 2000명의 조총 부대를 배치시켰다.

조명 연합군 평양성 서쪽 외성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모란봉, 칠성문, 보통문을 공격하고 이일 김응서 함구문을 공격하기로 했다. 명나라의 부총병 오유충 조선의 승병 부대가 처음으로 공격을 시작해 거짓으로 패한 척 후퇴하다가 다시 반격하여 승리했다. 하지만 조선군 8000명이 남쪽 함구문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2월 7일(음력 1월 7일) 새벽 일본군 3000명이 명나라 양호, 이여백, 장세작 등의 진지에 기습 공격을 가했으나 명군의 이를 물리쳤고 조명 연합군은 본진을 보통문 앞에 전진 배치하고 정희현 김응서의 기병대가 일본군을 유인하게 했으나 일본군은 속지 않았다.


이후 조명 연합군은 2일 동안 탐색전을 하여 일본군을 관찰하다가 2월 8일(음력 1월 8일) 대공세를 가했다. 명군의 대장군포,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랑기포 등 수많은 대포들을 평양성에 집중사격하고 외성 서남쪽 함구문은 명군의 조승훈 조선 이일, 김응서의 8000명 군사가, 칠성문 장세작이, 보통문 양호가, 모란봉 오유충 사명대사의 승병 2200명이 공격에 나섰다. 양측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오유충은 적의 탄환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을 독려하고 이여송도 타고 있던 말이 적의 탄환에 맞아 죽자 다른 말로 갈아타 군사를 지휘해 사기를 올렸다.

조명 연합군이 외성과 읍성을 함락시키고 중성으로 돌입해 일본군을 만수대 을밀대로 압박했고 일본군은 풍월정 아래에 굴을 파 최후의 공격을 가했다. 격렬한 전투로 양측의 사상자가 늘어나자 이여송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철수했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맺어 추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뒤 이날 밤 평양성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명군의 참장 이녕의 3000명 군사가 추격에 나서 358명을 사살했고 조선군도 추격에 나서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 60명을, 황주 판관 정화가 120명 등 총 538명을 사살했다. 이리하여 평양성을 7개월만인 2월 9일(음력 1월 9일) 조명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평양성에서 후퇴하던 일본군은 봉산-용천(서흥군)-배천을 거쳐 한양으로 철수했으나 그 과정에서 1만 8700명에 달하는 병력이 6600명으로 감소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그러나 이후 평양성 탈환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명나라군의 남병들이 이여송이 약속한 5000냥의 은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여송은 후방 의주에 남병 1300명을 유인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은 공을 세우지 못하자 자기 휘하의 군사들 중 허약한 군사들 60명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선조 평양성이 탈환되자 음력 1월 18일 의주를 떠나 남하를 시작했다.


<우키타 히데이에>


벽제관 전투(碧蹄館 戰鬪)는 1593년 2월 27일(음력 1월 27일) 임진왜란 중 벽제관(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서 일어난 조명연합군 일본군의 싸움이다.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과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중심으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다치바나 무네토라(立花宗虎), 다카하시 나오쓰구(高橋直次) 등이 이끄는 일본군이 격돌,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이 명군을 패퇴시켰다. 하지만 명과 일본 양쪽이 승전을 주장하는 중이다. 조선의 관리들은 명나라측 주장을 믿어 조선왕조실록에도 승리라고 기록을 해서 평양 전투와 벽제관 전투를 명나라의 승리로 알고 있었다.

당시 전투에서 이여송의 심복인 이유승이 이여송을 대신하여 죽었다.


<충무공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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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포 해전(熊浦海戰)은 1593년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 전, 원균 경상우수영 함대와 이억기 전라우수영 함대와 연합하여 왜군 100여 명을 사살한 전투이나, 이 해전에서 조선군 배 2척이 전복되었다.


<권율장군>

행주대첩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고,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불리며,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권율은 1593년 음력 2월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에게 금천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이때 의병장 김천일과 승병장 처영의 병사들도 합세하여 총병력은 관군 3,000여명과 의병 6000여명 등 병력은 총 9,0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행주산성의 지형은 후방에 한강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배수진의 형태였다. 또한 행주산성은 말이 좋아 산성이었지 높이가 120m 밖에 안되는 낮은 언덕에 위치한 것에 불과하였고 지대 역시 험준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행주산성은 그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성벽도 매우 낮은 토성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조선군은 토성 위를 목책으로 둘러싼채 싸움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열악한 조건속에서도 조선군은 휘하 다이묘들을 이끌고 공격해 온 우키다 히데이에의 일본군을 맞아 비격진천뢰 및 신기전 같은 최신 무기들과 천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 그리고 바위, 화살, 불덩이, 끓는 물까지도 퍼부어 7차례에 걸친 적의 총공격을 모두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최소 5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및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모두 부상을 입혔다. 특히 우키타 히데이에는 중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몰렸으나 부하 병사들이 우키타 히데이에를 업고 뛰어서 도망친 덕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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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 비격진천뢰도 맹활약한 바 있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第二次晋州城戰鬪) 1593년 7월 20일(음력 6월 22일)부터 같은 달 27일(음력 6월 29일)까지 진주성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593년 전쟁이 휴전기로 접어들면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오갔고, 그 결과 일본군은 북부 및 수도권 지역에서 철수, 남해안까지 물러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과정에서 일본군 전군에 진주성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이는 강화협상을 위한 무력시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침략 첫 해에 가장 큰 패배를 당했던(제1차 진주성 전투) 진주성에 대한 보복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거의 모든 일본군 병력이 진주성 한 곳에 집중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진주 근처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명군은 진주성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일본군 측에서도 고니시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의 의지가 확고하여 진주성만은 함락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차라리 자신들이 공격하기 전에 민간인들을 모두 내보내라고 권고할 정도였다.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 조선군도 진주성 근교까지 갔다가 절대적인 병력차를 확인하고 진주 구원을 포기했다. 그러나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은 진주는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이기에 진주만 공격하고 돌아간다는 일본군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성을 포기하라는 명군과 일본군의 권고를 거부했다.

결국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진주성 안에 있던 사람들은 군인과 민간인을 막론하고 전멸했다(조선 측 기록에서는 6만여 명, 일본 측 기록에서는 2만 여명). 그리고 일본군은 고니시가 말했던 대로 전라도를 공격하지 않고 남해안으로 내려가 버렸다. 조선 조정에서는 음력 7월 15일 명군에게 진주성 구원을 재차 청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바로 그 다음날 진주성 함락을 알리는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다. 이후 이 전투의 책임소재를 놓고 조선 조정에서 다툼이 일어났다.



제2차 당항포 해전 1594년 4월 23일(음력 3월 4일)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당항포 지역 인근의 왜군들을 몰아내기 위해 부하 어영담을 사령관으로 삼아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이 연합하여 출전한 6차 연합함대 출전이자 이순신의 12번째 해전이다.


장문포 해전(長門浦海戰)은 1594년 음력 10월 1일부터 음력 11월 18일까지 진행된 전투로서, 정유재란 이전의 마지막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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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발발

1597년 3월 1일(정유년 음력 1월 14일) 임진왜란을 종결시키기 위한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가 조선의 부산을 재침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이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2군이 웅천으로 상륙하여 북진하였다. 같은 해 8월 20일(음력 7월 8일) 일본의 후속부대가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하였다.

재침을 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서에는 적국(전라도)을 비롯한 조선의 하삼도를 점령하라 명령하였다. 그러나 하삼도를 점령하려면 보급이 원활해야 하는데 조선은 의도적으로 도로를 놓지 않아 수송은 전적으로 강과 바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이행하려면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무너뜨려야만 가능했는데, 일본군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조선 수군의 핵심인 이순신을 제거하게 되었다.

종교 문제와 일본내의 무단파와 문치파의 대립으로 인해 서로 불화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에도 공을 두고 경쟁할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재침이 명령되자 임진년과는 달리 가토 기요마사가 제 1진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러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토의 도해 정보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조정에서 다시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가토군이 부산에 상륙한 뒤였기에 이순신은 공격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지만 돌연 조정은 꼬투리를 잡아 이순신을 파면하고 대신 원균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앉혔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임명된 원균도 통제사 제직전에 자신의 주장과 달리 사태의 불리함을 깨닫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전하지 않는다. 특히 육군의 엄호 없이는 출전할 수 없다며 3월 29일 장계를 통해 30만 대군으로 안골포, 가덕도 등지의 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장계를 올린다. 이후에도 적과 싸울 생각없이 소수의 적을 보고도 바로 도주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키다 보다 못한 도원수 권율이 원균에게 엄한 곤장을 쳐서 출전시켰다. (사실 곤장을 친 이유는 원균이 조선조정을 입에 발린 말로 우롱한 것이 괘심하여 친 것이다. 곤장을 명령을 듣지 않아 쳤다는 이유는 와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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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또는 칠천 해전 1597년(선조 30년) 8월 27일(음력 7월 15일) 칠천도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등이 전사한다.


1597년 8월 16일(음력 7월 4일) 100척이 훨씬 넘는 판옥선, 거북선과 1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수군을 총동원한 원균 부산 인근에서 바람과 파도를 고려하지 않고 적을 추격하다가 12척의 판옥선을 표류하게 해 잃어버리고, 9일에는 오히려 적의 반격을 받아 역시 많은 전선을 잃게 된다. 실록에서는 이 때 아군이 활 한 번 제대로 쏘지 못 한 채 패했다고 하면서 아군의 대응을 문제삼았고, 케이넨의 조선일기에는 이 때 반격한 병력이 일본 수군이 아닌 육군 수송함대 병력인 것이 확인된다.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내리는데 이 때 적의 기습을 받았고, 원균은 400명의 아군을 버리고 도주한다. 1597년 2월 이순신이 부산포로 출동했을 때 가덕도에서 물을 긷던 초동 5명이 왜군에게 끌려가자 가덕왜성을 직접 공격해서 요시라가 직접 와서 포로들을 풀어주며 화친을 구걸했던 것과는 비교된다.


거제도 서쪽의 작은 섬 칠천도 남쪽에 정박했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야습을 당한 이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계속 퇴각한다. 원균은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않은 채 기록에 의하면 선상에서 폭음을 하였다고도 한다. 견내량 혹은 춘원포에서 삼도수군을 상륙하게 한 뒤 반격하지도 않은 채 도주했다. 포로가 되었던 조방장 김완이 진술한 《해소실기》에는 이 때 아군이 각기 수사를 따라 퇴각했다고 하면서 조선 수군이 기습을 받은 상황에서도 지휘권이 유지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지휘를 무시한 채 퇴각한 배들은 진해, 한산도 방면으로 향했고, 또한 선전관 김식의 초기 보고에 의해 전사했다고 알려진 수군 장수들 다수가 체찰사 이원익의 조사 결과 살아있음이 확인돼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를 통해 춘원포로 퇴각, 상륙한 것은 원균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칠천량 해전에서 판옥선을 잃었다 해서 장수와 수졸들이 전멸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고성 지역 춘원포까지 후퇴하여 통제사 원균과 중군장 순천부사 우치적은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경상우수사 배설은 전선12척을 이끌고 도망을 친다. 원균은 도망치다가 소나무 아래에 숨어있던 일본군들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한다. 이때 김완은 진해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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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전투(南原 戰鬪) 또는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전라도 남원성을 공격해 조명 연합군과 벌인 전투로, 조명 연합군뿐만 아니라 각지의 의병장들과 군민들까지 합세해 전투를 치렀으나 결국 패배해 모두 살해당하고 지휘관 이복남은 자결하였다.

남원성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자 이복남, 임현, 정기원, 신호 등은 성문으로 잠입하여 성을 점령한 5만 8천명의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 등은 성을 탈출하였다.


황석산성 전투(黃石山城 戰鬪)는 정유재란 당시 경상도 황석산성에서 곽준 조종도 밑 일부 백성들과 부녀자들까지 참여하여 왜군에 맞서 싸운 전투로 끝내 패배하여 황석산성은 함락당했다.


어란포 해전(於蘭浦海戰; 1597년 10월 7일(음력 8월 27일))은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후 치른 첫 번째 전투였다. 어란포는 현재의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있는 지명이다.

1597년 8월 27일(음력 7월 15일) 칠천량 해전 패전 후 남은 13척의 판옥선을 수습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던 중, 음력 8월에 왜선 8척이 남해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였다. 이 전투는 자신을 노출시켜 왜군을 유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또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직산 전투 1597년 음력 9월 7일 조명 연합군 충청도 직산(현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북진 중이던 일본군과 맞붙어 승리한 전투이다. 이 싸움에서 조명 연합군 일본군 순천, 울산 등지로 후퇴하게 만들었고 북진을 좌절시켰다.


벽파진 해전(碧波津海戰; 1597년 음력 9월 7일, 양력 10월 16일)은 어란포 해전에 뒤이어 벽파진에서 왜군의 소규모 함대를 격파한 해전이다.이 전투는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후 2번째 해전이다.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벽파진(현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에서 적선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로 왜군은 조선 수군이 확실히 13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순신의 복귀도 확인한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나중에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존재를 확인하나 첩보는 이미 보고받은 상태였다.

이 전투 역시 이순신이 왜군을 명량해협 쪽으로 유인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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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

명량 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300여 척을 격퇴한 해전이었다.


원균 윤두수를 비롯한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을 받고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을 통제사로 복권시키는 대신 품계를 낮춰 조선 수군의 지휘 체계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순신이 파직당할 당시 그의 계급은 대감급인 정헌대부 정2품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권하기는 하였으나 정3품의 계급으로 부여했다.



당시 수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이미 계급 인플레가 심했다. 수군 수사의 기준 품계인 정3품을 가진 장수들이 넘쳐났다. 계급이 같은데 보직만 다른 상황이 일어났고 이순신이 통제영을 장악했던 세월이 길었고 그의 영향력이 미쳤기에 그나마 군이 통제가 되었지만 각 장수들의 불만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상당한 충돌을 일으켰다. 명량해전이 끝나자 마자 교체되어 이순신이 전사한 이후에나 다시 전라우수사가 될 수 있었다. 난중일기에도 "만호"에나 어울릴 놈이라는 평가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선조는 이순신의 휘하장수였던 충청수사 권준과 무의공 이순신을 수도방위를 이유로 전투참가를 불허하였다.


이처럼 조선 수군은 지휘 체계의 엉망으로 각종 잡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시작부터 불안한 출발을 하였다. 더욱이 조선 수군에게 남은 전선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이순신이 1597년 9월 28일(음력 8월 18일)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이 남은 전선의 전부였던 것이다. 나중에 명량 해전을 앞두고 또 1척이 김억추나 송여종의 지원으로 추가되어 13척이 되었다.

칠천량의 패전의 손실이 커서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려고도 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려 수군폐지불가론을 펼쳤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 후,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했다. 이순신은 음력 8월에 일본 전투선이 어란포(현재 해남군 어란리 근처)에 나타난 것을 격퇴한 후, 음력 9월에 일본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음력 9월 15일 벽파진에서 해남의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겼다




제1차 울산성 전투(第一次蔚山城戰鬪)는 1597년 ~ 1598년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벌인 전투로 흔히 한국에서 알려진 울산성 전투는 제1차 전투이다.


조명 연합군은 왜군을 공격했으나 끝내 울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울산성이 공격받자 순천 고니시 유키나가는 울산성에서 가장 가까운 서생포왜성 양산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조명 연합군 양산에도 군대를 보내 왜군을 압박하고 서생포왜성에서 오는 구원병들을 울산 태화강에서 전멸시켰다. 성이 완전히 포위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말을 죽여 식량으로 삼고, 눈을 녹여 식수로 사용하는 등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심지어 가토 기요마사는 항복 대신 할복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한편 연합군 진영에서는 권율 양호에게 총공격을 하자고 건의했으나 양호은 장기전으로 왜군이 저절로 무너질 때 기다리자고 하여 장기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 각지의 왜군 구원병들이 속속 도착했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까지 내보내어 8만에 이르는 대군이 양산에 집결했다. 구원병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 장수이자 제4진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지휘했다. 왜군의 구원병 8만 명은 양산에서 조명 연합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울산성으로 진격했다.

결국 조명 연합군 1598년 2월 9일(음력 1월 4일) 철수를 결정하고 13일간의 울산성 전투는 종결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은 무려 1만 5,000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도 1만 5,000명의 병력 중 500명만 살아남았다.

이후 가토 기요마사 서생포왜성으로 퇴각해 수성전으로 방어를 구축하였고, 훗날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 구마모토 성에 120개의 우물과 고구마 줄기로 된 다다미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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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은 1598년 절이도(현재의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에서 왜군들과 전투를 벌여 왜적의 머리 71급을 베는 전과를 올린 해전이다.

7월 18일 명나라 수군이 도착한 지 2일째 날, 드디어 적함대 100여 척이 금당도(고금도와 거금도 중간의 섬)로 침범해 온다는 급보에 접하고서 이순신은 전함대에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한 다음 그날 밤에 길목인 금당도로 전진 결진하여 그 곳에서 경야했다. 그러나 이때 명나라 수군은 합세하지 않고 안전해역에서 후행하면서 관전하는 자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7월 19일 새벽에 일본함대는 거금도(절이도)와 녹도(소록도 근처) 사이로 뚫고서 금당도로 나오는지라 이순신 함대와 거금도 북방해역에서 해상 요격전이 벌어진 것이다. 난중일기의 이 당시 부분이 망실되었고 이충무공전서에도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천병을 모욕하는 일은 황제를 모욕한다는 취지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킴), 선조 수정실록(선조 31년 8월)에 보면 이순신 함대가 이를 요격하여 적선 50여 척을 분멸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나와 있다. 따라서 나머지 50여 척도 대파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순신자령수군(舜臣自領水軍 :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여) 돌입적중 발화포(突入賊中 發火砲 : 일본함대 속으로 돌진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소오십여척 적축환(燒五十餘隻 賊逐還 : 50여 척을 불태움에 적군이 쫓겨 되돌아갔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더욱 한심한 것은 이때 진린은 구경만 하고 있다가 전과가 욕심이 나서 이순신에게 와서 협박을 함에 할 수 없이 적의 목벤 것 40개를 진린에게 넘겨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국의 원군(援軍)이 참전하지도 않고 소국의 전과를 탈취해도 천군(天軍)으로 대접받는 판이었다.이 해전을 절이도(거금도)해전이라 하는데, 망국적인 사대·왕조사가들이 왜곡 집필한 「이충무공전서」에 이 사실이 누락되어 있어 간과하기 쉽지만, 당시 이순신이 명나라 수군을 배후 지원세력으로 업고서 명량대첩의 전훈을 되살리면서, 원균의 하극상에 의해 실패한 장문포·영등포해전의 쓰라림을 생각할 때, 결코 허술하게 대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군 피해없이 적함 50척을 수장시킨 대전과가 정확하고 정직하게 공식문서에 기록·반영되지 않았음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아무튼 이 해전의 성과로 이순신 함대는 고금도에서 거금도까지 지배해역을 확대함으로써 고흥반도 이서의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이때 분멸한 적전선 50척과 대파 내지 반파된 적전선 50척에 탑승한 적군을 산정하면 16,000여명이 된다. 물론 아군은 함선 손실은 없었지만, 전사상자가 30여명이 발생한 것으로 나와있다. 이 해전이 격전이었으며 엄청난 적군의 인명손실이 있었기에 사실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1795년에 윤행님(尹行恁)이 편찬한 「이충무공 전서」에는 녹도만호 송여송이 진린에게 적전선 6척과 수급 69개를 상납한 사실이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봐 거금도앞 바다가 적의 시체로 가득찼던 것이 틀림없다. 1598년 7월 19일 치러진 절이도(거금도)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명군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서진중이던 100척 규모의 적함대를 거의 괴멸시키는 대전과를 수립함으로써 적의 요새지인 예교(광양만)까지는 못미치지만 고흥반도까지는 완전 장악하고, 이제 계속 동진하여 여수반도를 끼고 있는 순천만과 남해도의 서측방 광양만을 장악하면 전라도 수역을 확보할 수 있게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나라 수군을 동원하여 연합작전을 펴 일본의 요새진지인 예교(관음포) 앞 포구에 주박하고 있는 100여 척의 함선을 분멸시키면, 고니시는 고립무원의 신세가 될 것이고 왕년의 한산도 전진기지를 재탈환 확보함으로써 경상도 해역까지 망라하는 광활한 남해의 제해권을 쥘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이순신은 골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예교 공격을 위한 결정적 시기만 탐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사실을 간파한 진린이 사전에 방해공작으로 가로막는지라, 이에 이순신은 여러번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통분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엉뚱한 처방을 내린 선조의 작태가 더욱 한심하다. 내용인즉 명군 경략(총사령관격)에게 건의하여 진린을 육장으로 전임시키고 수군 유격장 계금으로 하여금 명나라 수군과 조선 수군을 통합 지휘토록 함으로써 수륙합공으로 예교를 점령하자는 고육지책을 구상한 것이다. 이 소식이 진린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대노하여 이순신에게 호통을 쳤다. 결국 진린에게 약점만 잡힌 선조는 이 조처를 시행치 못하고 없었던 것으로 하였다.

이 해전이 시작하기 며칠전 칠천량 해전에서 포로가 되었다 돌아온 김완이 귀국하여 왜 수군 진격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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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울산성 전투(第二次蔚山城戰鬪)는 1597년 ~ 1598년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이 벌인 전투로 제2차 전투는 울산왜성에서 벌어진 전투로 조명 연합군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패배하였고 일본군은 주변의 성으로 후퇴하였다.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의 제독 마귀는 별장 김응서, 선거이 등과 함께 다시 조명 연합군 3만 9,000명의 병력을 모아 울산 도산성을 다시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선거이가 전사한다. 하지만 왜군은 철수 준비로 인해 울산왜성, 서생포왜성에서 철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충선 김응서 휘하로 농성 중이던 가토 기요마사의 1군을 섬멸하여 가선대부를 하사받았다.




왜교성 전투

1598년 8월 18일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고 직후에 고부교(奉行)과 고다이로(大老)는 일본군의 철병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조·명 연합군은 철병하는 침략군을 추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전환하였다.

1598년 7월 경략(經略) 형개(邢驚)가 한성으로 당도하면서,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울산왜성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 군을 공격목표로 한 동로군과, 사천왜성 시마즈 요시히로 군을 공격목표로 한 중로군, 왜교성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공격목표로 한 서로군을 편성하여 동시에 남진하였다. 이와 아울러, 진린의 명수군과 이순신의 조선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따로 편성한 다음 순천왜교성을 함께 공격하도록 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즉, 육상의 삼로군과 수로군을 동시에 병진하게 하여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세웠다. 9월부터는 일본군의 상호간의 구원전략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면서 남해안 일대의 적군에 대한 공격을 일제히 개시하였다. 그러나 울산왜성의 일본군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웠고, 사천왜성 공격 또한 명장 동일원(董一元)의 조급한 작전으로 패퇴함으로써 결국 사로병진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서로군의 제독 유정은 8월에 들어와 대군을 거느리고 한성을 출발하여 수원을 경유, 전주로 내려온 다음, 순천 왜교성의 적을 치기로 하였다. 그는 9월 19일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 등이 이끄는 1만여명의 조선군을 포함, 3만 6,000의 병력으로 왜교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수로군은 1598년 7월 16일 고금도에서 명나라 진린이 이끄는 수군과 합세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합세하였다. 그리고 7월 24일 조명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흥양의 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에서 승리 후, 9월 하순에 이르러 마침내 조-명연합육상군과 연합 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정유재란의 최후의 총격전을 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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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이순신 장군 전사)

노량해전(露梁海戰)은 정유재란 당시 1598년(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을 포함한 조명 연합수군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운 전투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공격한다. 이것이 순천 왜교성 전투이다. 6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운 조선 수군은 일단 고금도로 귀환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유키나가의 병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사천 선진리성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 고성에 주둔 중이던 다치바나 무네시게, 남해에 주둔 중이던 소 요시토시 등은 고니시 군을 구출하고 본국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해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수군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그러나 시마즈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뒷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조선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觀音浦)에 매복시켰다.

이튿날인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고, 이후 순천왜성 포구를 나선 유키나가의 일본 수군과 진린의 명 수군이 합세하여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같은 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으며, 가리포첨사 이영남 · 낙안군수 방덕룡 · 초계군수 이언량 흥양현감 고득장 등도 일본 수군의 배에 올라타서 분전하여 일본 수군의 칼에 베이거나 조총에 맞아서 전사했고,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추격 도중 자신의 판옥선에 불이 나서 그 틈을 타 일본 수군이 자신의 판옥선에 올라타는 걸 보고 분전하다가 목이 잘려 전사하였다. 이 때 도주하던 150여 척의 일본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결국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 군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즈 군과 함께 일단 부산에 집결, 그 즉시 퇴각하였으며 노량 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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