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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뽀로로친구에디 2018. 1. 29. 13:45

고려 공민왕

공민왕(恭愍王, 1330년 5월 23일 (음력 5월 6일) ~ 1374년 10월 27일 (음력 9월 22일), 재위: 1351년 ~ 1374년)은 고려의 제31대 국왕이다.

고려 공민왕 영정 (조선후기작, 작자미상)

공민왕은  충숙왕의 차남이며,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이다. 

당시 원나라(몽골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

무신정권의 고려

즉위 초반에는 무신 정권의 세력 기반을 혁파하고 원나라(몽골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국을 선언하였으며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노국대장공주(보르지긴 보타슈리)의 사후 개혁의지를 상실하였다. 한때 신돈 등을 등용하여 권문세족과 부패 관료와 외척을 정리하고 신진사대부를 중용하는 등의 개혁정책을 폈으나, 신돈과 의사 충돌로 제거하였다. 이후 남색과 술, 향락에 탐닉하던 중 1374년 홍륜, 최만생의 반란에 의하여 시해당했다. 영명하고 다재다능하였으며, 특히 그림과 서예는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다고 한다.😀


공민왕이 직접 그린 《염제신 상》


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공민왕의 개혁(恭愍王-改革)은 즉위한 지 두 달, 그는 전격적으로 개혁작업에 돌입해 2월 초하루에는 무신정권의 최우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지하여 권문세가의 세력을 억압했다.  원나라의 지배력이 대폭 약해진 틈을 타서 공민왕은 본격적인 반원 자주화 개혁정치를 폈다. 대륙의 정세가 동요하자 이를 이용하여 몽골의 기반을 끊고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과감한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우선 친원 세력의 우두머리인 기씨 일족을 제거했다. 기씨는 원 순제의 황후가 된 기자오의 딸을 중심으로 횡포를 부리던 인물들로, 기철 등이 있다. 그리고 공민왕은 몽골의 풍습·연호·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때의 옛날 제도로 복구시켰으며, 정동행성·쌍성총관부를 철폐했다. 그는 쌍성총관부를 공격, 원나라가 지배했던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다. 1369년 이인임(李仁任),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동녕부를 정벌케 하였다. 그는 또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 후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의 침입을 받아 최우, 이성계등이 활약하였으나 국력이 소모되었다. 1371년 음력 7월 신해환국(辛亥換局)으로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이로써 공민왕의 개혁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신돈을 잃은 공민왕도 더 이상 개혁의지를 갖지 못하고 방황하고 만다. 그해 음력 9월 동녕부를 다시 공격하는 명을 내렸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돈의 제거 이후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낀 그는 술과 남색에 빠져 방황하게 된다. 공민왕이 홍윤(洪倫), 최만생(崔萬生) 등 자제위(子弟衛) 소속의 미소년들을 궁중에 출입하게 하여, 그들과 동성애를 즐겼다는 주장이 있다.하지만 이 사실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건국 명목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 고려사에는 왜곡을 해서 쓴 경우가 있기에 공민왕이 동성애를 즐겼다는 사실은 정확하지 않다. 홍윤은 공민왕의 후궁이었던 익비(益妃)와 간통하였는데, 이를 최만생이 은밀히 공민왕에게 보고하였다.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아는 자를 모두 죽여야겠다"고 말했다. 최만생은 자신까지 죽게될까 두려워 홍윤에게 사실을 고해바쳤고 며칠 후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신하들과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방화를 일삼았다. 결국 공민왕은 도망가려다가 홍윤, 권진, 홍관, 한안, 최선, 최만생에 의해 붙잡혀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에 시해당했다. 홍윤과 최만생 등은 공민왕을 칼로 수차례 난자하였고 목과 사지를 베고 저자거리에 매달았다. 공민왕 향년 44세였다. 그 후, 칼질을 한 자들이 “밖에서 적이 들어왔다.” 라고 부르짖었는데, 가까이서 호위하던 위사들은 겁을 먹고 움직이지 않았고 오히려 홍윤 편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고, 재상을 비롯한 신하들 또한 변고를 들었음에도 궁으로 들어오는 자가 없었다. 오직 내시 이강달만이 진실을 알았는데, 그 또한 이를 비밀에 부쳤다. 다음날, 정권을 잡은 쿠데타 세력은 임금의 명령을 이용하여 이인임, 경복흥, 안사기 등을 소집해 사태 수습을 논의했다. 이인임은 처음에는 승려인 신조를 의심해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던 도중 병풍과 최만생의 옷에 묻은 피를 보고 사건의 진상을 알았으며, 홍윤 등 일파는 체포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고 삼족을 멸하는 극형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이인임에 의해 어린 우왕이 즉위하면서 이인임의 섭정이 전개되었다. 우왕은 공식적으로 궁녀 한씨의 소생이었으나 실은 신돈의 여종인 반야의 소생으로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에 시달렸으며, 이성계 일파는 이를 사실로 내세워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닌데도 고려의 왕권을 찬탈하여 고려 왕조의 맥이 끊긴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의 개국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조선 종묘 내에 있었던 고려 공민왕 내외 영정.

공민왕은 밖으로 반원 자주화, 안으로는 권문세족 일소를 목표삼아 개혁정치를 펴면서 그 일환으로 성균관을 재건, 유학(성리학)을 장려하고 때묻지 않은 유능한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그 결과 비록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의 반격으로 실패했지만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개혁 세력이 중앙 정치무대에 자리잡게 되었다.

고려 31대 국왕 공민왕 어진, 유리건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