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고구려 연개소문 집권
연개소문 상상도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jwlee0652.quiz1
키워드 한국사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jwlee0652.chosun_quiz1
연개소문은 정변을 통해 영류왕을 몰아내고 보장왕을 왕위에 새운 후 대막리지가 되어 642년부터 664년까지 고구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연개소문(淵蓋蘇文, 617년 ~ 666년 5월)은 고구려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가이다. 일명 개금(蓋金)으로도 불린다.
《삼국사기》에는 영류왕 14년(631년)에 고구려의 서쪽 국경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을 때, 왕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장성 축조를 감독하도록 했다. 영류왕과 대신들은 연개소문의 성품을 두려워하던 끝에 죽이려 모의했으나, 연개소문은 이것을 사전에 눈치를 채고 자신이 통솔하는 군 사열식에 대신 1백여 명(《일본서기》는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 등 180여 명」)을 초대하여 모두 살해하고, 대궐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였던 장(臧)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었다. 연개소문은 막리지에 오르고 이전 귀족회의가 가지고 있던 병권(兵權)과 인사권(人事權)을 장악하였으며,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 자리에 오르며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연개소문은 외교정책을 대당강경책(對唐强硬策)으로 이끌었다.
연개소문이 보장왕을 옹립한 해에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대야성(大耶城)을 잃고,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당항성(唐港城)을 공격당했다.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에 백제 공격을 위한 군사를 요청하러 왔을 때 연개소문은 태대대로(太大對盧)로서 그를 영접하기도 했다(《삼국사기》 김유신전). 고구려 조정은 김춘추의 군사 요청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신라가 차지한 죽령(竹嶺) 일대의 옛 고구려 영토 반환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김춘추는 고구려의 감옥에 감금되었다가 「귀국하는 즉시 영토를 반환하겠다」는 거짓을 적은 편지를 보장왕에게 바치고서야 간신히 풀려났다.
보장왕 2년(643년) 3월에 연개소문은 당의 숙달(淑達) 등을 초청하고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들여오는 등 고구려에 도교를 수입하여 불교 세력의 견제를 꾀했고, 평양(平壤)에 새로 용언성(龍堰城)을 쌓았다. 이 무렵 당에서는 연개소문이 일으킨 쿠데타에 대해 '신하로서 왕을 시해한 죄'를 물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칠 계획을 모의하고 있었지만, 당 태종은 일단 고구려에 대해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 연개소문의 도사 파견 요청을 수락하는 한편 윤6월에 보장왕을 상국(柱國) 요동군왕(遼東郡王) 고려왕으로 책봉해 고구려왕으로서의 지위 계승을 공인해주기도 했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jwlee0652.quiz1
키워드 한국사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jwlee0652.chosun_quiz1
보장왕 19년(660년) 7월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멸망시켰고, 고구려에서는 10월에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당은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契苾何力)과 좌무위대장군 소정방, 좌효위장군 유백영(劉伯英), 포주자사(蒲州刺史) 정명진 그리고 홍려경(鴻臚卿) 소사업(蕭嗣業)을 보내 고구려를 치게 하였으며, 가을 8월에는 평양 방면으로 진군한 소정방이 고구려군을 패강에서 격파하여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수도 평양 부근까지 접근하기도 했다. 연개소문은 9월, 아들 연남생을 압록강에 보내어 요동 방면의 공격을 맡고 있던 글필하력의 군대를 막게 했지만, 글필하력은 얼어붙은 압록강 위를 걸어 고구려군을 공격해 3만 명의 고구려군이 전사하고 연남생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는 등의 참패를 겪었다. 하지만 글필하력은 직후 철륵족이 일으킨 반란으로, 부여 방면에서의 고구려 공격을 맡았던 소사업과 함께 철륵 진압에 투입된다.
이때의 전투에 관해 일본측 자료인 《일본서기》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 7년(661년) 12월의 기록에, 고구려군이 당군의 침공을 격퇴하여 당군의 보루를 빼앗고, 두 곳만 남겨둔 채 밤에 야습할 계획을 세웠지만 당군 병사들이 웅크려 우는 소리에 마음이 약해져 차마 빼앗을 수가 없었다는 고구려측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김인문열전에도 패강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평양을 포위한 소정방의 당군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군사와 말이 많이 죽거나 다쳤으며 군량을 조달받을 길도 끊어졌다(士馬多死傷, 糧道不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김인문은 소정방이 백제를 칠 때 당군에 있었고 그가 당으로 돌아갈 때에도 동행했으며, 661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군량을 가져다주러 가는 길에 동행).
보장왕 22년(662년) 봄 2월(《삼국사기》는 정월), 옥저(沃沮) 방면의 고구려 공격을 맡았던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백주자사(白州刺史)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 강가에서 연개소문의 군대에 포위되어, 10만 명에 달하는 전군이 몰살당하고 방효태 자신도 13명의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사수 전투). 평양을 포위했던 소정방도 2월 6일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이 수송해준 군량을 받고 폭설을 이유로 곧장 철수하였으며, 당의 고구려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고구려-당 전쟁 참조)
이후 연개소문은 664년에서 666년 사이에 사망하였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jwlee0652.quiz1
키워드 한국사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jwlee0652.chosun_quiz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