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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전 23승 이순신장군

뽀로로친구에디 2018. 9. 27. 14:56

23전 23승 불패의 신화 이순신 장군 


어떻게 가능할까? 

준비하지 않은자 망한다. 준비하는자 승리한다. 

조선 수군을 훈련시킨 건 왜구!! 

매일 연습 같은 실전 


일본은 섬나라 였지만 전투용 선박은 없고 오로지 수송선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빨리 노를 저어 상대방의 배에 올라타 육박전을 벌였다고 한다. 

이걸 바로 등선육박전이라고 한다. 

등선육박전: 뱃머리를 마주대고 서로의 뱃전에 뛰어올라 칼과 창으로 승부를 겨루는 전투 방식. 

하지만 우리나라는 접근하지 못하게 포를 사용하여 공격한다. 

우리나라는 천자총통을 이용했다. 


천자총통: 조선전기부터 후기까지 사용했던 화기. 총통 중에서 가장 크고 원거리를 발사할 수 있는 활포 


우리나라 주력선은 판옥선 

판옥선은 2층구조 


일본배는 세키부네 

세키부네는 일본 전국 시대에서 에도 시대까지 사용된 군용함 종류 중 하나로 공격력과 방어력은 약하지만, 회전이 좋고 속도가 좋아 기동력이 우수함. 

일본 애들이 배에 계속 기어 올라와서 판옥선에 등을 만든게 거북선이다. 


임진왜란 2년 , 휴전 3년, 

일본(왜)은 전쟁을 끝내는 조건으로 명나라 황제 딸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시집보내고, 조선의 경기,충청,전라,경상도를 일본에게 바치라는 말도 안되는 조건을 건다. 

그래서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 

정유재란이 발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경상충청전라 등 3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종2품의 관직. 초대 통제사는 이순신이었음)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내면서 70개 고을을 통제하였고, 조선 병력의 50%를 가지고 있었으며, 백성들이 이순신 장군이 통제하는 지역으로 흡수되면서 이순신 장군은 인기가 높아지자... 질투와 의심이 만은 선조는 이순신 왕국이 세워지는걸 두려워하고 싫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이던 가토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와가 있었는데 둘의 사이는 최악이였다고 한다. 고니시 유키나와는 반간계(거짓 정보로 적의 내부를 이간질 하는 계책)로 조선 조정에 부산에 가토기요마사가 상륙한다는 정보를 흘린다. 

이 첩보를 입수한(반간계 빠진) 조선의 왕 선조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좋아한다." 그리하여 선조는 이순신으로 하여금 부산으로 가서 가토기요마사가 부산으로 상륙하기전에 바다에서 부셔버리라고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이순신장군은 선조의 명령에 주저주저한다. 

이순신 장군이 23번 싸워 23번 이겼던건 "승병선승이후구전"이라고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승리를 만들어 놓은 이후에 전쟁을 한다. 즉 우리에게 유리한 지역인지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전투만 나가는 전략이다. 

위험하거나,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면 절대 적진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게 이순신의 스타일이다. 

이순신 장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한양(서울)로 압송한다. 

이게바로 이순신 장군의 백의 종군이다.  (1591년 1월, 이순신은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됨. 4월 1일 백의종군의 명령으로 풀려남.)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파직되고 한양으로 압송된 이후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이 임명된다. 

원균은 선조에게 왜군을 무찌르겠다고 큰 소리치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부산 앞바다는 위험한 곳을 알게 되었다. 원균도 미적미적하게 된다. 그래서 당시 합참의장쯤 되는 권율 장군이 내려가게 된다. 권율 장군은 원균에게 곤장을 때린다. 지금으로 따지면 병사들 보는 앞에서 합참의장이 해군참모총장 엉덩이를 벗기고 곤장을 때는는 모습이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이렇게 쓰여 있다.(통제사 원균은 매양 육로에서 먼저 안골포등의 적을 치라고 미루면서 바다로 나가 군사 작전을 벌여 오는 적을 막을 생각이 없으니 신(권율)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혹은 전령으로 혹은 돌려보내면서 호되게 나무랐고 세 번이나 도체찰사에게 군관을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89권 30년(1597) 6월28일 

그리하여 원균은 160척의 판옥선과 2~3척의 거북선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왜군에게 개박살이 난다. 그게 바로 칠천량해전이다. 


칠천량해전(임진왜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

왜 박살났을까 ?? 160척 배들은 풍랑에 노를 젓는 격군들이 힘들어졌고 물과 음식을 구하기 위해 거제도 칠천량으로 갔는데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크게 당했다. 그때 당시 육지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에게 싸움 상대가 되지 못할정도로 전력차가 컸다. 즉 바다에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몰살 당했다. 

다행히 배설 장군이 배 12척을 가지고 도망을 친다. 그래서 12척이 남아 있는 거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경상 우수사 배설과 옥포 안골의 만호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선조실록 90권 30년(1597) 7월 22일 )

그래서 다시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오게 된다. 다시 복귀하니 배 12척뿐... 

그리고 선조도 "내 무슨 할말이 있으리... " 이순신에게 사과를 한다. 

그리고 선조는 바다를 버리고 권율장군과 합치는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때 이순신 장군은 유명한 말을 남긴다. "미신불사 상유십이" 

미신불사 상유십이: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않았고, 저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이순신 장군은 뒤늦게 무신이 된 사람이였지만, 그전에는 20살때까지는 문과를 준비하던 사람이여서인지 글재주가 참으로 좋았다. 

이순신 장군 전투 스타일은 무모한 전투는 절대 하지 않는건대 12척의 배로 수백척의 왜군을 어떻게 감당하려 했던 것일까? 

이순신 장군은 바다를 포기하면 일본군의 보급이 원활해져 전쟁에서 이길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에게 남은 작전은 딱 하나였다. 

이순신 장군은 병사들을 모아놓고 얘기를 한다. 병법에 이르길 한 사람이 좁은 길을 막고 있으면 천 명의 사람이라도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300에서도 스파르타군 300명이 페르시아군 수십만명을 좁은 협곡으로 유인해서 싸워이기는 모습과 똑같은 논리인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또 명언을 남긴다. "필생즉사 필사즉생"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으로 적들을 유인하기로 한다. 


울돌목은 전남 진도와 해남반도 사이의 좁은 해로로 바닷물이 간조와 만조의 때를 맞추어 좁은 해로를 일시에 지나가므로 조류가 험한 것으로 유명하다. (쉽게 말해서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다.)

즉 해로가 좁기 때문에 일본 왜군의 수백척의 배를 가지고 있어도 수십척의 배만 그 해로를 통과 할수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에서 일자진을 펼쳐서 들어오는 적을 박살내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하면 일본 수군은 후퇴를 하게 된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궁금증이 생긴다. 올둘목을 우회해서 지나가면 되는거 아닌가? 


그런데 그 우회로는 맹골수도이다. 

맹솔수도는 전남 진도군 서거차도와 맹골군도 사이를 지나는 바닷길이다. 선박 운항에 특별한 주의가 필요할 정도로 조류가 험한곳이다. 

그리고 그 당시 배는 사람이 노를 젓는 거기 때문에 최단거리를 확보할 필요성이 있는것이다. 

그래서 울돌목을 맞고 서있던게 명량입니다. 

명량해전: 정유재란 때 조선수군은 12척의 배로 울돌목의 좁은 수로에서 일자로 진을 치고 적의 통과를 막은 해전. 

이순신 장군은 시간까지 계산했다. (밀물과 썰물이 바뀌는 시간) 

이순신 장군이 전군 출전하라 

배 11척이 이순신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 배 1척이 일본 왜군 160척을 상대하는 꼴이 되었다. 이게 바로 160대 1이다!! 

17대1은 아무것도 아닌것이다. 사실 160대1은 불가능하다. 

뒤에서 바라보던 11척의 배들에 있던 병사들은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바라보게 되었다. 

죽고자 하는 살것이라는게 빈말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부하들의 배들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왜선 31척을 완파하고 70척을 반파시킨다. 

그리고 밀물이 썰물로 바뀌면서 완파되고 반파된 왜선의 잔해물들이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왜선들과 썩이게 된다. 배들이 뒤얽혀서 난장판이 되버린다. 

그 당시 외군 수장은 와키자카였는데 명량해전서 패배하고 도망간다. 

와키자카는 한산도대첩에서도 이순신에게 패배해서 트라우마가 있던 인물이였다. 

그리고 겨울이 오고 왜군들은 동장군에게도 깨지게 된다. 

1598년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죽는다. 

모두가 싸움을 중단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멈추지 않았다. 

당시 작전권을 가지고 있던 명나라 장군 진린을 찾아가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만약 저들을 이대로 보내면 우리를 업신여겨 다시 쳐들어 올 것입니다. 

저들은 평화롭게 살던 우리 백성들을 도륙하고 죽이고 우리의 영토를 짓밟은자들입니다. 

그래서 진린도 승낙하게 된다. 

그래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쫒아 전투를 하게 된다. 

이게 바로 노량해전이다. 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신다. 

그리고 유명한 유언을 남긴다.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마라"

죽는 그 순간까지 전투와, 백성의 안위를 걱정했던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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