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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뽀로로친구에디 2018. 9. 27. 16:32

인천상륙작전


작전명 : OPERATION CHROMITE


이것은 6.25전쟁 당시에 열세에 몰려있던 우리가 전세를 역전시켰던 가장 대표적이고도 위대한 사건입니다. 

때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T-34탱크 등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김일성 부대는 38도 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강행하게 됩니다. 단 사흘 만에 우리의 수도인 서울이 북한군에게 함락당했고, 한 달 만에 낙동강 동쪽을 제외한 전 지역이 북한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미국은 이것을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고 16개국 군인들로 구성된 유엔군을 이끌고 부산항으로 입항하게 됩니다. 


16개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그리스, 터키, 남아프리카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 맥아더 장군이었습니다. 

만약 부산에서 전면전을 펼칠경우 적의 주력부대가 너무 강하다 보니까 아군에게 피해가 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것은 남해와 서해를 은밀하게 돌아서 인천에 상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맥아더 장군은 인천으로 상륙했을까요?

첫번째로 서울하고 가깝습니다. 43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도인 서울을 수복하면 적의 주력부대에게 심리적 타격감을 주게 됩니다. 

두번째 모든길은 서울로 나있습니다.

이 도로를 차단해 버리면 이들의 보급로를 끊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식량과 탄약이 공급이 안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미국 해군은 반대 의견을 냅니다. 

왜 반대하느냐?

첫번째 반대 이유는 인천으로 들어가는 수로가 너무 좁습니다. 

당시 유엔군의 함정이 261척에 7만명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수로가 좁으면 신속하게 이동을 못하게 되고 

거기다가 북한군이 기뢰(물에 떠 있는 지뢰)를 띄워 놓으면 이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는 큰 조수간만의 차로 제한된 상륙시간입니다. 

바닷물이 쭉 들어왔을때(밀물) 신속하게 상륙을 해야하는데 그 밀물이 차 있는 시간(만조 시간)이 2시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이때 북한군이 격렬하게 저항을 하면 상륙할 수 없고, 점점 물이 빠지게 되면 약 4km나 되는 엄청난 갯벌이 눈 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그 질퍽질퍽한 갯벌에 어떻게 군인들과 물자를 내려놓을수 있겠습니까? 이런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성공할 확률은 5000대 1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고집하게 됩니다. 

그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확률이 5000대1 밖에 안된는 이유였습니다. 

왜? 적이 가장 방심하는 지역일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밀물이 가장 많이 들어와서 인천 항구에 수심이 가장 깊은 날로는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 이였습니다. 단 3일뿐이였습니다. 그래서 9월 15일 00시 야심한 밤에 인천상륙작전을 강행했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단 2시간 

그렇다면 이 작전을 어떻게 성공시켜야 할까? 

맥아더는 2가지 미션을 던지게 됩니다. 

첫번째는 성동격서: 손자병법에 나오는 내용인데 동쪽에서 소리를 쳐서 적군의 시서을 쏠리게 한 다음에 적의 허점이 되는 서쪽을 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마치 상륙할 것처럼 거짓 무전을 적에게 흘리게 됩니다. 

거짓 무전 내용 "9월 2일 원산 폭격 예정 9월 19일 120척 함대 군산 집격, 10월 14일 주문진 상륙 혹은 평양 서쪽 남포, 해주, 군산, 원산, 주문진, 울진 등 정신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폭격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장사상륙작전도 벌입니다. 적의 시선을 끌게 하기 위한 페이크 상륙이었습니다. 여기에는 772명의 우리나라의 중고등학생들(학도병)이 뽑혀 갑니다. 총을 쏘는 훈련도 약 보름밖에 받지 못한 10대 소년들이 차출돼서 문산호를 타고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상륙을 하게 됩니다. 하필이면 이때 배는 태풍을 만나서 배는 좌초되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10대 소년들은 육지로 헤엄쳐 갑니다. 식량과 총알은 단 3일뿐이였습니다. 그들은 용감하게 폭풍우를 헤치면서 나아가게 됩니다. 당시 포항과 영천 방면을 잇는 국도를 점거하고, 적의 북상을 저지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북한군의 시선은 동쪽으로 쏠리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구조선이 출발했지만 우리 소년병들은 그곳에서 교전하다가 대부분 전사하게 됩니다. 

맥아더의 두번째 미션은 엑스레이(X-RAY)작전 입니다. 엑스레이 작전은 상륙작전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서 첩보부대를 구성합니다. 이때 구성된 첩보부대가 해군 첩보부대입니다. 인천상륙작전 영화의 주인공인 이정재씨가 맡은 장학수 대위가 해군 첩부 부대 리더로 출연하게 됩니다. 이 해군 첩보 부대는 은밀히 인천 지역으로 잠입을 합니다. 

그래서 지역 주민의 도움을 받아서 해안포의 위치, 병력 규모 그리고 수로에 배치되어 있는 기뢰의 위치와 제거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됩니다. 이때 또하나의 부대 '켈로 부대'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천 앞다바다에 있는 팔미도 섬으로 상륙을 해서 북한군과 교전 끝에 등대를 점령하게 됩니다. 상륙 당시 불빛을 켬으로써 맥아더 장군의 함대를 인천으로 부르게 됩니다. 그 불빛은 전쟁 승리의 불빛이였습니다. 이렇게 작전은 성공했고 서울은 9월 28일 수복을 하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합니다. 우리군은 북진을 해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가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 유엔군, 우리 군인뿐만 아니라, 나라를 구하고자한 학생들, 이름 모를 지역 주민들등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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