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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영국의 시인이자 연극인이며, 가장 훌륭한 극작가이다.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중부 농촌 마을 스트랫포드에서 1564년 4월 23일에 태어났다. 당시 영국도 계급사회였는데 셰익스피어 집안은 평민집안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영국의 계급 질서가 점차 무너지는 시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 존은 셰익스피어를 공부시켜서 상류층으로 올라갈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존은 셰익스피어를 그래머 스쿨에 입학시켰습니다. 당시 교육은 라틴어가 대세였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특히 작문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집안이 급속도로 기울면서 셰익스피어는 그래머 스쿨도 그만둬야 했습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라틴어를 읽을 줄도 알았고, 쓸 줄도 알았습니다. 그래머 스쿨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평소에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되어 그래머 스쿨에 가지 않는 것을 내심 즐거워했습니다.
소년 세익스피어는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스트랫포드는 작은 도시여서 쉽게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알바를 구해도 그 아버지가 구교도라는것을 상점 사장을 알게되면 그 사장은 셰익스피어에게 나가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구교도는 차별받았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 집안이 기울어진것도 아버지 존이 구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겨우 일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건 '소 도살'이였습니다. 어린나이에 웬만한 담력이 아니고서는 소를 도살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셰익스피어는 망설임 없이 송아지에게 다가가 칼을 들고 송아지의 목젖을 갈랐습니다. 그렇게 셰익스피어는 쇠고기 상점에서 일을 하게 되고 유행처럼 번지던 구교도 탄압도 진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한 신교도들은 더이상 구교도를 억압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다시 평화로운 세상이 왔지만 아버지 존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힘없는 늙은이로 회생불구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법률가 사무실에서 서기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셰익스피어는 쇠고기 상점을 그만두고 법률가 사무실에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쇠고기 상점에서 일하면 돈을 조금 더 벌 수 있지만, 늘어 가는 것은 도살 기술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법률 사무실에서 일하면 세상돌아가는것도 알고 인문 지식이 늘것 같아 법률 사무실에서 일하기로 결심하고 법률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법률가가 시험삼아서 라틴어 해독을 시켰는데 그의 실력이 대학을 나온 자신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것을 확인한 법률가는 셰익스피어를 서기로 채용합니다.
셰익스피어는 법률사무실에서 일하게 되면서 서가에 꽂힌 책들을 모두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아침을 맞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성경, 사기, 오비드 등을 모두 외워 버렸습니다. 또 법률 서적을 읽기 시작하면서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법률이 오히려 사람들을 괴롭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읽을 책이 없으면 또 이미 읽은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책 읽는것 만큼 연극 보는것도 좋아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셰익스피어는 연극을 보면서 옆을 힐끗힐끗 보왔습니다. 다름 아니라 옆자리에 앉은 여인 때문이였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쇼터리에 살고 있는 앤 헤서웨이였습니다. 쇼터리는 스트래포드에서 조금 떨어진 아름다운 작은 마을이였습니다. 공연장에서 만난 여인을 잊지 못한 셰익스피어는 쇼터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셰익스피어는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앤과 결혼하였습니다. 😀
셰익스피어는 스트랫포드 사람들의 추천으로 선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높은 지식 수준이 소문났기 때문입니다. 오직 셰익스피어만의 엄청난 독서량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나이 스무 살때 이미 세 아이를 거느린 가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소년들이 성인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여우 사냥을 하여 얼굴에 여우의 피를 묻히거나 사슴 목장에서 사슴을 훔쳐서 먹고 마시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추수철이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흔히 하는 놀이였습니다. 1586년 셰익스피어가 스물두 살 되던 해 사슴서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목표는 루시 경의 사슴목장이였습니다. 하지만 사슴서리를 하다가 걸리게 되고 셰익스피어와 젊은이들은 루시 경의 하인들에게 몽둥이로 매질을 당하게 됩니다. 셰익스피어는 분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슴 서리는 귀족들이 한 해 동안 농사를 짓느라고 수고한 지역 주민에게 베푸는 일종의 선물 같은 관행인데 매질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루시 경을 비웃는 글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청 앞에 붙이게 됩니다. 그걸 안 루시 경은 화가나서 셰익스피어를 자신의 성에 있는 감옥에 가두겠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귀족은 재판없이도 평민을 가둘수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게 되면 귀족의 화가 풀릴때까지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귀족은 사람을 죽여도 재판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법원과 상관없이 스스로 재판을 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셰익스피어는 스트랫포드를 떠나 런던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단 몇시간만에 셰익스피어의 안정된 생활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런던까지 가는 길도 쉽지 않았습니다. 숲 속에는 도적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도적떼들을 제거하는 일을 군대도 빈번히 실패할정도로 쉽지 않은 도적떼들이였습니다. 그때 당시 런던 주변 숲 속에도 루빈후드라는 유명한 도적이 있을때입니다. 그리고 그는 런던에서 그의 친구였던 리처드 필드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리처드 필드는 셰익스피어에게 런던을 구경시켜 줍니다. 셰익스피어 눈앞에 펼쳐진 런던은 스트랫포드에서 꿈꾸돈 도시가 아니였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눈앞에 펼처진 런던의 참상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운좋게도 셰익스피어는 법률 사무소에 취직했습니다. 😀
언제나 안개가 끼여 있어서 도무지 몇 시인지 가능조차 할 수 없는 런던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종 소리를 들어야만 시간을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런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던 셰익스피어는 어느날 연극을 보게 됩니다. 평소 연극에 매우 관심이 많았던 셰익스피어는 연극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법률 사무소를 그만두고 극장을 찾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연기 경력이 없는 그가 하게 된일은 극장 앞에서 말 지키는 일이였습니다. 말 지키는 일에 성실함을 인정받은 셰익스피어는 배우를 섭외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연극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중에 연극에 출연 중이던 배우 한 명이 갑작스럽게 괴질에 걸려 죽게되면서 셰익스피어가 갑자기 대역을 맡게되게 됩니다. 그렇게 첫번째 배역은 몇마디 대사 떠듬거리는 병정이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단역을 맡게 되었고, 본인이 배우로서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연기 재능에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로를 연극 대본을 고쳐 쓰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당시에는 남이 이미 써 놓은 작품을 조금 고쳐서 공연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연습삼아 써 놓은 희곡을 읽는 순간 그들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보다도 희곡에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 풍부한 독서량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였습니다.
마침내 셰익스피어는 랭커스터 극단의 전속 작가가 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예전에 공연된 적이 없는 자시만의 순수 창작극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의 극단들은 새로운 내용으로 연극을 공연하기를 꺼렸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소재를 공연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 시간이 필요했고, 무엇보다도 관객들이 찾아올 것인지 흥행에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창작극은 성공하게 되고, 나이 스물 여덟의 셰익스피어는 단번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벼락출세에 배아파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대학 출신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셰익스피어의 학력과 가문을 문제 삼아 셰익스피어를 깍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런던은 괴질이 퍼지기 시작하고 수천명이 쓰러지면서 런던은 사람이 모이는 극장을 폐쇄하게 되고, 셰익스피어는 유럽대륙으로 가서 로마, 독일, 덴마크 등 유럽여행을 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유럽 여행의 경험을 작품 속에 담았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서른 살 전후에 <베로나의 두 신사>, <착호 희극, 사랑의 헛수고>, <베니스의 상인>, <한여름밤의 꿈>, <존 왕>, <리처드 2세>, <리처드 3세>, <헨리 4세>등 수많은 희곡을 썼습니다.
1594년 20만 명이었던 런던 인구의 10분의 1인 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괴질은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극장 문도 다시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챔벌레인 극단의 전속 작가가 되었습니다. 유명해진 셰익스피어는 극작가로서 왕실에서까지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런던의 사교계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언제나 셰익스피어에게 초대장이 왔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쓴 극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대사가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극장에 딸린 자신의 서재에서 펜을 들고 비극 속에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햄릿>,<오셀로>,<리어 왕>,<맥베스> 인류에게 길이 남을 4대 비극은 셰익스피어의 이런 노력 끝에 빛을 본 것입니다.
스트랫포드를 떠나온지 24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셰익스피어는 태어난 날과 같은 날인 1616년 4월 23일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