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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VS 거란

뽀로로친구에디 2018. 1. 15. 16:58

고려 VS 거란(요) 

제1차 고려-거란(요) 전쟁

제1차 고려-거란 전쟁 993년(성종 12년) 10월 요나라 소손녕(蕭遜寧)이 6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전쟁이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박양유(朴良柔)와 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는 한편, 성종(成宗)이 친히 안북부까지 나아가 전선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고 선봉장 윤서안이 사로잡히자, 성종은 서경으로 돌아왔으며, 조정에서는 청화사(請和使)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또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과 함께 서경 이북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등의 주장이 난무하였고, 할지론이 대세로 굳어가는 경향을 보였으나, 서희와 이지백(李知白) 등이 항전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므로 성종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한편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고려에 화친을 제안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희를 급파해 소손녕의 화친 제의에 답하였다.


소손녕은 서희와의 담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는 우리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략하여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분할해 바치고 조빙을 잘 한다면 무사할 것이다.


이에 대해 서희는 소손녕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압록강 안팎은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교활하게 거짓말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어렵다.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 하지 않겠는가?



이에 고려는 동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興化鎭), 통주(通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등의 이른바 강동 6주를 설치하여 그 영토를 압록강 까지 확장시켰다. 결국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요나라와의 약조와는 달리 비공식적으로나마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요나라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 압박에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


1010년(현종 1년) 11월 요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해 왔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관계를 맺고, 목종을 대신하여 그 사이에 나온 아들을 왕으로 잇게 하려하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했으며 강제 출가한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거란의 실제적인 의도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여 고려와 거란간의 관계를 재차 확인시키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규(楊規)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하였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고 요 성종은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거란은 이어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다시 항복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거세졌으나 강감찬(姜邯贊)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회군가다가 구주 등에서 양규와 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양규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초조대장경 조판 

요나라(거란)의 침입을 받아 곤경에 있을 때 불심(佛心)으로 그것을 물리치기 위하여 간행에 착수하였다.

현종 때부터 문종 때에 걸쳐 완성되었다. 대구의 부인사(符仁寺 : 지금은 없음)에 도감(都監)을 두고, 《대반야경》 6백 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천여 권을 목판에 새겨 만들었다.

이 《초조대장경》은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을 받아 병화(兵火)로 없어졌고, 약간 남아 있는 것은 일본 교토 난젠지(南禪寺. 南禅寺. 남선사)에 1,715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제3차 고려-거란 전쟁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요는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다.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 고려는 1만 2,000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이어진 공격을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 전술로 인해 식량 공급에도 큰 차질을 빚었다. 소배압은 다음 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강감찬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인해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거란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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