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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형제 독서 리뷰입니다.
형 윌버 라이트는 1867년, 동생 오빌 라이트는 1871년에 태어났다. 라이트 형제는 과학 교육에 관심을 가진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는 목사였고, 어머니는 손재주가 좋은 가정주부였다. 라이트 형제는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팽이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그 팽이는 자이로스코프 팽이라고 한다. 그 자이로스코프 팽이는 연필 끝에 올려놓아도 돌고, 서커스처럼 줄타기도 잘하는 팽이여였다. 이 팽이는 빨리 돌고 있는 동안에는 균형을 잃지 않아서 돌 수 있는 자이로스코프 팽이였다. 그때 당시 자이로스코프는 증기선이 아무리 높은 파도가 밀려와도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사용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역시 많은 곳에 쓰인다. 라이트 형제는 언제나 못 쓰는 시계를 주워 와서는 뜯어 보곤 했다고 한다. 역시 그 팽이도 분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들은 항상 꾸지람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먹을걸 가지고 실험할 때는 어머니가 꾸짖었다고 합니다. 라이트형제는 송진을 녹여 설탕을 넣어서 껌을 만들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설탕을 다 써버려서 라이트형제가 무슨 실험을 하든 야단치는 일이 없든 어머니도 음식 재료에 손대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답니다.라이트 형제는 어렸을 때 새 수레를 갖기 위해 동네에 있는 뼈조각들을 모아서 비료 공장에 팔았다고 합니다. 크고 튼튼한 수레가 생기면 나무 장작과 석탄, 과일들을 날라서 돈을 벌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 수레는 30달러, 라이트 형제가 번 돈을 2센트였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낡은 수레를 끌었습니다. 1878년 가을, 목사인 아버지는 새 교회로 일터를 옮기게 되면서 지금 살던 오하이오 주보다 훨씬 서쪽에 있는 낙후된 아이오 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인디언 마을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인디언 놀이를 하고 놀았다고 합니다. 라이트형제는 손재주가 좋아서 다른 아이들에게도인디언처럼 새털 달린 머리띠, 두꺼운 종이로 만든 작은북 등을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인디언 놀이를 하다가 진짜 인디언 소년들을 만나 두들겨 맞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인디언 소년들과도 친해져서 잘 놀았습니다.라이트 형제의 아버지는 교회 일로 자주 출장을 다니시는데 한 번은 시카고에서 장난감 헬리콥터를 선물해주셨습니다. 고무줄 달린 작은 대나무 장난감을 빙글빙글 돌려서 손을 떼면 '윙'하는 소리를 내면서 높이높이 날아 올라가는 거였습니다. 이 장난감은 값비싼 장난감이어서 라이트형제가 헬리콥터를 날릴 때마다 다른 부모들이 싫어했다고 합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아이들 옷이나 사 입히지." 사실 다른 부모들은 헬리콥터 때문에 매일같이 아이들에게 졸렸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그 헬리콥터를 수백 번, 수천 번하늘에 날리다 보니 날지 못할 정도로 고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그래서 그 헬리콥터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라이트형제는 아이들에게 수레를 태워주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돈을 모아 헬리콥터 재료를 사서 만들어 날렸지만, 헬리콥터는 이상한 소리를 몇 번 내더니, 그만 몸체가 휘어지며 힘없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때 이 장난감의 과학적인 원리를 잘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수레가 항상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1881년 라이트형제 윌버와 오빌은 인디애나 주 리치먼드에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일하는 교회가 또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곳에서도 라이트 형제는 거듭되는 실패에 함께 하늘을 나는 장난감을 계속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물체가 하늘을 나는 원리를 전혀 모르는 채 만들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들은 날개는 움직이는 힘은 커다란 날개가 아니라 고무줄이라는 걸 알았고, 또한 공기와 날개의 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연을 만들어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학급신문을 만들기 위해 활자를 사서 종이에 잉크를 바르면서 롤러로 밀었습니다. 그렇게 한 장, 두 장 만들면서 피곤해졌습니다. 여러 사람이 오랜 시간 걸려 학급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한 장 한 장 롤러로 밀어야 하니 그것이 가장 큰일이야" 라이트 형제는 또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오빌은 어머니가 재봉틀 일을 하면서 재봉틀의 페달을 밟으면 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인쇄기에 페달을 달 생각을 했습니다.😀 이튿날, 인쇄기에 페달을 달았습니다. 페달을 밟으면 롤러는 빙글빙글 돌며 종이 위를 미끄러져 나갑니다. 그렇게 만든 신문과 지난번에 만든 손으로 밀어서 만든 것과 비교하니 손으로 미는 것보다 깨끗하고, 시간도 단축시켰습니다. 그래서 라이트 형제는 마을 신문, 광고 전단지까지 만들어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때라이트 형제 형 윌버는 스물한 살, 오빌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어느 날 갑자기 에드의 자전거를 수리할 일이 생겼습니다. 에드의 자전거는 공기 튜브가 든 타이어를 가진 신식 자전거였습니다. 라이트형제는 그 자전거를 분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에드는 그 자전거를 라이트형제가 주었습니다. 그리고 라이트 형제는 자전거에 급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인쇄소는 에드에 넘겼습니다. 자전거에 관심이 높아진 라이트 형제는 "라이트 자전거 회사"를 차리게 됩니다. 당시 새 자전거는 한 대에 100달러였다고 합니다. 매우 비싸서 살 수 있는 사람이 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라이트 형제는 헌 자전거를 사서 타이어와 헌 부속품을 갈아 끼우고 페인트를 다시 칠해서 새 자전거처럼 고쳐서 새 자전거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팔기로 합니다. 그렇지만 그걸 팔려면 선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라이트 형제는 자전거 경주에 나가서 1등을 하면 될 거라 생각을 하고 라이트 형제의 오빌은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8000미터를 달렸다고 합니다. 오빌은 연습을 하면서 바람의 저항을 깊이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자전거 대회를 열고 오빌은 1등을 차지합니다. 계획처럼 라이트 형제의 자전거는 팔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자전거 이름은 "라이트 플라이어" 라이트 형제는 바빠졌습니다. 라이트 플라이어의 주문이 자꾸자꾸 들어왔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자전거 회사일은 다른 기술자들에게 맡기고, 글라이더를 만들기로 합니다. 사람들은 굴러오는 돈을 아무 소용없는 곳에 쓴다고 흉을 보고 나이 먹은 사람들이 연 놀이를 한다고 별난 사람들이라고 흉보고 그랬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글라이더는 차츰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타지 않고, 연을 날리는 것처럼 굵은 줄을 매어 날려 글라이더는 마치 연처럼 천천히 하늘로 떠올랐습니다. 키티 호크의 해안 모래 언덕 위로 가져가 글라이더에 직접 타고 날기로 합니다. 형 윌버가 타기로 합니다. 글라이더는 윌버를 태우고 천천히 30미터쯤 날아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180미터까지 날게 됩니다. 하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는 날수가 없었습니다. 글라이더가 날려면 초속 20미터 정도의 바람이 있어야 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이트 형제는 자신들이 초속 20미터로 달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동력원을 글라이더에 달기로 합니다. 그 후 약 1년 뒤 글라이더에 가솔린 엔진과 프로펠러를 장착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제는 글라이더가 아니라 최초의 비행기가 완성된 것이었습니다. 1903년 12월 17일 아침 키티 호크 모래 언덕 레일 위에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비행기를 보는 사람들은 무거운 가솔린 엔진을 단 그 비행기가 하늘을 난 다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비행기는 '부르릉, 부르릉' 엔지 소리를 내며 레일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날았습니다. 270미터, 59초 동안 날았다고 합니다. 인간이 처음으로 동력을 이용해 새처럼 하늘을 난 순간이었습니다. 이 뉴스는 어느 지방의 신문사의 직접 목격한 기자의 신문에만 뉴스에 실렸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라이트 형제는 이 비행기를 미 육군에 팔아 보려고 했지만 미 육군은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라이트 형제는 더욱더 연구하여 40마력 엔진을 장착한 비행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윌버는 그 당시 비행기 연구가 가장 앞서 있던 프랑스로 가지가 프랑스 관계자들의 앞에서 1시간 2분 30초나 날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빌은 다시 미국 육군 앞에서 수많은 육군 장군들 및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1시간 15분 10초 동안 날았다고 합니다. 며칠 후 미 육군 셀프리지라는 병사가 자진해서 오빌과 함께 비행기를 타게 되고 비행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때 비행기가 추락하여 미 육군 병사는 목뼈가 부러져 사망하고 맙니다. 다행히도 오빌은 살았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안전한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셀프리지의 영혼에 사죄를 하고 빌었습니다. 그 뒤 라이트형제는 비행기 개량에 더욱더 힘쓰게 됩니다.
그 다음 해인 1909년 미국 대통령 앞에서 1시간 35분 12초 동안 날게 됩니다. 라이트 형제는 그 이후로도 비행시간의 기록을 세워 나갔습니다. 그리고 미국 데이턴 시에 처음으로 비행기 공장을 세우고 비행기 발전이 눈이 부실 정도의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럽 각지에서 비행을 하면서 유럽의 여러 나라에 라이트 형제에게 비행기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비행기는 8시간 가까이 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비행기에 온몸을 다 바쳐온 윌버는 1912년 5월 29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 윌버는 마흔 다섯 살이었다고합니다. 형 윌버가 죽자 동생 오빌은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모든 일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하늘을 난 지 30년이 되는 해, 미국 정부는 1932년 12월 17일 비행 기념비를 키티 호크에 세웠습니다. 오빌은 형 윌버와 함께 이 기념비를 함께 보았으면 생각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빌도 1948년 1월 30일 일흔일곱 살로 일생을 마칩니다.
라이트 형제를 초 간단 요약해보면 어렸을때부터 수레 하나로 배달 알바 및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서 한 푼, 한 푼 돈을 모와 본인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또 본인들이 성공시킨 작품으로 인쇄소를 만들어 전단지 인쇄업을 해서 돈을 벌고, 우연히 자전거 수리를 하게 되면서 새로운 창업을 하고, 마지막으로 미지의 세계인 비행기 최초 제작 및 판매까지 정말 대단하신 진정한 창업의 신이자 영리한 발명가인것 같습니다. 실패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라이트 형제 멋있습니다!!